칠흑같이 어두운 밤, 저 멀리 갈대숲에 무언가의 기척이 느껴진다. 괜스레 오싹한 느낌이 들었지만 누구일까 궁금한 마음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날카롭고 긴 송곳니가 눈에 들어온다. 역시 녀석은 무시무시한 존재일까? 그런데 그 순간! 녀석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는 게 아닌가. 두려웠던 마음도 잠시, 마주한 녀석의 눈망울은 참으로 맑고, 선함 그 자체였다.
이처럼 주로 밤에 활동하며, 긴 송곳니를 지니고 있는 동물을 밤에 갑작스럽게 마주한다면 제 아무리 사람이라도 깜짝 놀랄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보다 몇 배는 더 화들짝 놀라 줄행랑을 칠 것이 분명할 만큼 겁이 많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게 녀석이다.
녀석의 이름은 ‘고라니’이다.
고라니는 한반도에서 가장 흔히 만날 수 있는 포유동물 중 하나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사슴과 동물 중에는 개체수도 가장 많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슴을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릴만한 뿔 대신 송곳니를 지니고 있다. 이런 특징 때문일까? 우리나라에서 고라니를 모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라니를 ‘잘’ 아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또 고라니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실제로 고라니가 멸종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고라니는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에서 멸종위기의 정도에 따라 지정하는 적색목록에 취약(VU, Vulnerable) 수준에 등재되어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나마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포유동물인데, 세계적으로는 멸종위기 야생동물인 셈이다. 현재 고라니가 살고 있는 나라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과거 전시나 사육의 목적으로 유럽으로 건너갔다가 야생화 되어 영국이나 프랑스 등지에서 살아가는 일부 개체군이 있긴 하지만, 고라니가 토착종으로 서식하는 나라는 오직 우리 한반도와 중국, 두 지역뿐이다.
IUCN(세계자연보전연맹)에서 제공하는 멸종위기 동물의 서식 분포를 담은 위성지도. 자세히 보면, 한반도와 중국에만 주황색의 표시가 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 IUCN) |
중국 양쯔강 남부의 일부 지역에 서식하는 고라니는 개체군이 그리 많지 않아 보호종으로 지정되어 있고, 일부에서는 복원사업까지 진행 중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떨까? 실제로 전 세계에서 고라니의 서식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 한반도이다. 만약 한반도에서 고라니가 사라진다면, 고라니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멸종위기 수준에 이를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처럼 멸종위기 수준이 높아 적색목록에 까지 등재되어 보호를 필요로 하는 고라니지만,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고라니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우리에게 고라니는 멸종위기 야생동물이기 이전에 ‘유해 야생동물’ 혹은 ‘유해조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인가에 나타나 애써 가꿔놓은 농작물에 피해를 준다는 것이 주된 이유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남는다. 왜 우리는 고라니가 유해 야생동물이기 이전에 우리나라의 토착종이고, 세계적으로 멸종위기에 처해있으며, 만약 우리나라에서 고라니가 사라진다면 정말 절멸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은 알 수 없었을까?
고라니는 사람에 의한 포획, 차량과의 충돌, 콘크리트 농수로 추락, 질병감염 등에 의해 개체수가 조절되고 있다. |
이에 대한 답은 아마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 일 것이다. 고라니의 처지를 돌아보기에 앞서, 고라니로 인해 피해를 겪은 사람들의 마음을 우선 헤아려야 한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 때문에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대부분 고라니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해 보도하기 시작했고, 이를 접한 사람들은 자연스레 고라니에 대한 편견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농작물이나 축내는 성가신 녀석’, ‘너무 많아 마구 잡아내도 상관없는 녀석’, ‘어차피 잡아낼 거, 구조의 손길을 내미는 것도 사치인 녀석’ 정도로 여겨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고라니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대부분이 부정적이다. 정작 고라니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가 고라니를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주를 이룬다. (출처 : MBC) |
고라니로 인해 발생하는 피해도 헤아려야겠지만, 고라니에 대한 일방적인 편견, 부정적 시선, 왜곡된 정보가 난립하고, 이 과정에서 고라니에 대한 가학적 처치가 만연하게 이루어지거나 무분별하게 포획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우리나라에 고라니가 많다고는 하지만 정작 얼마나 많은지, 조절해야 한다면 그 적정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판단할 수 있는 연구결과 역시 부족한 상황이다. 특히나 세계적으로 희귀한 유전자원은 개체수가 많더라도 유전자 다양성이 감소할 수 있음을 고려해 인위적인 조절에 신중해야 한다.
단순히 눈에 많이 보인다고해서 괜찮을 거라는 믿음은 버려야한다. 과거에 우리와 부대끼며 살아왔던 동물들이 왜 지금은 볼 수 없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면 답을 알 수 있다. 우리의 편견, 시선, 왜곡이 그 원인이었을 수 있다.
단순히 눈에 많이 보인다고해서 괜찮을 거라는 믿음은 버려야한다. 과거에 우리와 부대끼며 살아왔던 동물들이 왜 지금은 볼 수 없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면 답을 알 수 있다. |
무분별한 개발과 환경오염, 인간의 거주지 확대와 농토 확보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면서 자연 생태계가 속수무책으로 훼손되어왔다. 서식지가 줄어들고 먹을 것을 찾기 어려워진 동물들에게 농작물을 재배하는 곳은 그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자. 그들이 우리에게 피해를 주고 싶어서 혹은 그들이 행한 것이 우리에게 피해가 된다는 것을 알고서 하는 잘못이 아니지 않은가. 사람들이 산에 올라 임산물을 채취하고 도토리를 주워오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야생동물이 사람들의 거주지 부근으로 내려와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행위로 인식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쉽다. 단지 그들은 그들의 삶을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조금은 이해해주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만약 동의한다면, 이쯤에서 다시 기억하자. 고라니는 전 세계적인 멸종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을, 콘크리트 농수로에 빠져 서서히 굶어가는 녀석을 보며, 농작물이나 축내는 나쁜놈을 뭐하러 구조하냐는 말이 얼마나 가시 돋친 말인지를.
작성자
충남야생동물구조센터
재활관리사 김봉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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