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생명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매번 선택의 순간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 선택의 옳고 그름은 신이 아닌 이상 스스로가 판단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 그 선택에 대한 평가를 내릴 때, 최소한의 후회만을 남기고 싶은 마음에 신중에 신중을 가한 선택을 내리게 됩니다. 구조센터에서 내리는 선택 중 가장 어려운 것을 꼽자면 역시 ‘안락사’ 라고 생각합니다.
안락사는 생존의 가능성이 아주 낮은 환자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인위적으로 생명을 단축시키는 행위입니다. 하지만 이 정의만으로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안락사이기도 하지요. 생명을 결정짓는 부분이니만큼 안락사를 찬성하는 이, 반대하는 이, 찬성과 반대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들의 논쟁 역시도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그만큼이나 안락사는 많은 이에게 여겨짐에 있어 복잡하고 민감한 부분이기도하죠.
왼쪽 날개에 큰 상처를 입은 괭이갈매기.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신경손상으로 인해 날개를 쓸 수 없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어찌해야할까요... |
현재까지는 사람보다는 동물에 한해서만 안락사가 시행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안락사는 특히나 야생동물에 있어 조금 더 넓은 영역까지도 포함하고 있는데요, 생존의 가능성이 아주 낮은 것 외에, 생존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상태는 아니더라도 자연으로의 복귀가 불가능한 영구적 장애를 갖게 되는 동물 역시 안락사 대상에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생명에 지장이 없는데 안락사를 한다니 너무한 것 아니냐고요? 물론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야생동물을 보호하는 구조센터와 같은 기관에서 안락사는 생각보다 중요한 의의를 지닙니다. 안락사가 그들의 ‘생명’을 다룸과 동시에 ‘복지’ 역시도 고려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영구적 장애를 지녀 자연으로 돌려보내지는 못하지만 무턱대고 안락사를 금지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첫 번째로, 사람이 동물을 보호한다는 것에 따르는 물리적인 한계에 따른 문제가 있습니다.
머무는 계류장에 그들이 필요로 하는 산이나 바다, 너른 들판을 가져다 넣을 수 없으니까요. 먹고 싶은 각종 먹이와 따사로운 햇빛, 시원한 바람 역시도 야생에서 누릴 수 있는 만큼 충분히 공급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그들이 자연에서 누리는 수많은 것을 잃게 되는 것이죠. 특히나 이런 영구장애를 지닌 동물의 대부분은 머무는 동안 계속해서 치료나 처치 등 사람의 간섭이 요구되는 경우가 많아 스트레스에서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처럼 사방이 벽이나 철망 등으로 둘러싸인 계류장에서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권리나 복지를 저하시키는 결과일 수 있다는 점을 고민해야 합니다.
이처럼 사방이 벽이나 철망 등으로 둘러싸인 계류장에서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권리나 복지를 저하시키는 결과일 수 있다는 점을 고민해야 합니다. |
두 번째로, 안락사하지 않는 동물을 돌봄으로써 발생하는 또 다른 기회의 상실이 있습니다.
안락사를 하지 않는다면 결국 센터는 수많은 동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모든 계류공간이 포화상태가 되면 정작 피해를 받는 이는 앞으로 구조되어 치료와 재활을 필요로 하는 또 다른 야생동물입니다. 공간과 시간, 인력과 예산은 한정되어 있기에 동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동물 개별에게 투자되는 부분이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다른 야생동물의 성공적인 치료와 재활을 저하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지요. 그렇기에 안락사의 시행은 조금 더 생존 및 방생에 대한 가능성이 높은 동물을 위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혹시 여기서 의문을 가지시지는 않았나요? 공간과 시간, 인력과 예산이 부족하다면 그러한 역할을 대신해줄 수 있는 또 다른 기관이나 개인에게 분양해 돌봄을 받게 해주면 되지 않겠냐는 의문이요.
어느 정도는 맞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센터 역시 혹시나 가능하다면 영구장애를 지닌 동물을 보다 나은 환경에서 지낼 수 있도록 여러 방법을 고민하고 있으며, 그 중 일부는 동물을 장기간 보호할 수 있는 다른 기관(동물원 등)에 보내서 자연환경 보다는 부족하지만 남은 생을 지낼 수 있게끔 조치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분명한 한계는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야생동물을 보호할 수 있는 대부분의 기관은 이미 동물이 포화상태입니다. 보내려고 해도 보낼 곳이 없습니다. 있다 하더라도 그곳의 환경이나 적극성, 동물에 대한 적절한 사육 방법 등을 지니지 못한 채 공간만 가지고 있는 곳이라면 보낼 수 없습니다. 이는 기관이 아닌 일반인에게 보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일반인은 야생동물에게 필요한 환경을 갖추어줄 여건이 되지 않으며 전문지식 역시 부족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안락사하는 것이 안타까워 아무 곳에, 아무한테나 보내면 이후에 발생하는 문제는 누가 책임져야할까요? 특히나 개인의 경우 사육하다가 유기하는 문제, 야생동물을 분양받아 악용하는 문제 역시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 번째로, 어차피 안락사할거라면, 장애가 있더라도 자연으로 돌려보내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게 하자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혹여나 장애를 지닌 채로도 자연에 적응해 잘 살아갈 수 있는 일말의 희망도 있을 수 있다고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충남야생동물구조센터에서도 무조건 완벽함 그 자체인 동물만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아니니까요. 날개가 조금 처지더라도, 시력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충분한 관찰을 통해 야생적응의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자연으로 돌려보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돌려보낼 수 없다고 판단했을 때에는 이미 충분한 검사와 관찰을 통해 여러 경우의 수를 고려한 이후입니다. 그런 동물이 무조건 살아남을 수 없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이 너무나 적은 것 역시 사실이니까요.
결국 안락사 판정이 내려져 고통을 줄이기 위해 호흡마취 과정에 있는 괭이갈매기 |
구조센터에서의 안락사가 분명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고, 나름의 긍정적 의미도 지니고 있지만, 정작 안락사의 결정을 내리고 시행하는 직원들에게도 가벼운 문제는 아닙니다. 안락사를 고민하는 순간부터 마음 한 구석에 미안함과 불편함이라는 커다란 돌덩이가 내려앉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마지막 선택을 내려야 합니다. 어찌 보면 구조센터에서 내리는 수많은 선택 중 가장 어렵고 가슴 아픈 선택의 순간이죠. 안락사를 진행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합니다. 한 생명의 촛불을 끌 수 있는 권리가 과연 우리에게 주어저도 되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 개체의 안락사 판정은 정말로 적절한 결정이었는가? 어쩌면... 안락사는 위태롭고 고단했던 삶을 편안히 마칠 수 있는, 그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권리이지 않을까?
아무리 고민해도 결국 정답은 따로 있습니다. 안락사를 할 수밖에 없었던, 치명적인 사고를 겪은 이 동물들이 생겨나지 않을 공존의 세상을 만들어야 된다는 것이죠.
작성자
충남야생동물구조센터
재활관리사 김봉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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