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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3일 월요일

움직이는 돌덩이로 변해버린 너구리가 흘리는 눈물

살아 움직이는 돌덩이가 있다면 누가 믿을까? 메두사의 눈을 마주하거나, 마법사가 나타나 살아있는 존재에게 돌로 변하는 마법을 부렸다는 신화 속에나 나올 이야기일 테니 당연히 믿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직접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돌덩이가 움직이는게 아니라, 움직이는 무언가가 마치 돌덩이를 닮은 것이다. 그리고 이 무언가는 분명 살아있기에 움직인다.
움직이는 돌덩이... 녀석의 정체는 '개선충에 감염된 너구리'이다.

개선충에 감염된 너구리의 모습은 마치 돌덩이 같기도, 소보로빵 같기도 하다.
어쨌든 야외에서 녀석을 마주한다면 흠칫 놀랄만한 모습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정상적인 상태의 너구리
개선충 감염 너구리와 비교해보면, 과연 같은 종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개선충증(Scabies, Sarcoptic mange)은 외부기생충인 Sarcoptes scabiei가 원인체이고, 대다수의 포유류가 이 기생충에 감염될 가능성이 있지만, 국내 야생동물 중에는 단연 너구리가 감염에 취약하다. 개선충에 감염된 너구리를 본 사람들의 반응은 보통 한결같다. 대체로 안쓰럽다, 무섭다, 징그럽다, 더럽다, 꺼림칙하다 정도이다.

이 녀석이 바로 너구리를 위협하는 '개선충'이다.


너구리가 개선충에 취약한 것은 녀석이 가진 생태적 특성이 크게 한몫 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굴과 같은 곳을 은신처로 이용하는 너구리는 이를 공유하는 배우자나 새끼와 같은 가족들에게 전면적으로 전파될 가능성이 높다. 또, 공동화장실을 이용하면서 주변의 다른 개체들과 의사소통 등의 교류를 나누는 특성상 개체 간 접촉 가능성이 높기 때문일 것으로 판단된다. 뿐만 아니라, 개선충은 어떠한 이유에 의해 면역력이 낮아진 것이 아닌, 건강한 개체라도 얼마든지 감염이 될 수 있다는 점도 위협적이다.

개선충에 감염된 새끼 너구리 남매. 너구리는 대체로 배우자 혹은 가족
단위의 무리로 생활하기에 개체 간 접촉에 따른 질병전파 가능성이 높다.


개선충에 감염되면, 보통은 귀와 겨드랑이, 복부, 다리에서 시작되어 몸 전체의 털이 빠지고, 심한 가려움증, 표피박리, 만성피부염 등을 유발한다. 갈라진 피부에 상처가 발생하면서 2차 감염에도 취약해진다.
심한 가려움증으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 자체가 불가해지기에 먹이를 취식할 수 있는 기회 역시 감소한다. 이는 당연히 체중의 감소, 탈수로 이어진다. 궁극적으로 심각한 영양결핍과 면역력 저하, 저체온증에 따른 폐사로 이어지는 경우가 빈번하다. 너구리에게는 치명적인 질병인 셈이다.

개선충에 감염되어 정상적으로 먹이활동을 할 수 없게 된 너구리 형제가 녀석들을 불쌍하게 여긴 누군가가 놓아준 음식을 먹으며 허기를 체우고 있다.


개선충 감염은 너구리의 개체군을 조절하는 폐사원인 중 차량과의 충돌과 더불어 매우 큰 영향력을 끼칠 것이라 판단된다. 실제로 일본에 서식하는 너구리를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중 일부에 따르면, 개선충 감염이 너구리의 가장 지대한 폐사원인으로 작용한다는 연구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너구리의 개선충 감염은 특히 겨울철에 더 발생이 두드러지는 것으로 보인다. 낮아지는 기온과, 먹이활동의 제한 등 겨울은 정상적인 너구리조차도 살아남기 가장 힘든 계절이다. 그만큼 몸의 면역능력이 떨어져 더욱 잘 감염될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개선충은 사람에게도 감염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감염되더라도 사람의 몸에선 생활사를 이어갈 수 없어 증식하지 못한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자연적으로 없어진다. 다만, 한동안 가려움증으로 인한 고생은 불가피하다. 실제로 야생동물구조센터에 종사하는 직원들은 야생동물과의 접촉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만큼 질병전파를 차단하기 위해 예방의 노력을 기울이지만, 매년 한, 두 명이 개선충에 의해 잠시나마 가려움을 호소한다. 하지만 뭐... 모두 잘 살아있다.

개선충에 감염된 너구리를 다루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최대한 직접 접촉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항상 뜻대로 될 수는 없는 법...


개선충에 걸린 너구리가 무조건 죽음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조기에 발견해 구조할 수 있다면 충분히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이다. 빠져버린 털로 인해 떨어질 체온을 유지해주면서 수액처치를 통해 탈수 및 전해질을 교정한다. 동시에 항생제와 항기생충제 같은 약물투여를 병행한다면 치료가 가능하다.
다만, 감염 초기에는 활동성이 떨어지기 전이므로 보통의 너구리처럼 마주할 가능성이 낮고, 설령 마주하더라도 경계반응과 운동성 남아있는 상태라 구조하는 것 역시 쉽지 않다. 중증으로 번지고 나서야 그나마 눈에 띄어 구조가 이루어지니 구조센터에 들어오는 너구리의 대다수는 이미 치료가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인 것이다.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서야 발견된 너구리의 모습.
몸에 붙어있는 노란 것은 '파리알'이다. 파리를 쫓을 힘조차도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개선충의 치료가 끝났다고 바로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계절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다시 어느 정도 털이 자라나 보온능력을 갖출 때까지 구조센터에 머물게 된다.


개선충 치료가 끝난 너구리의 모습
털이 다시 자라 체온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질병이나 전염병이라면 기겁을 하고, 마냥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경계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꼭 나쁘게만 볼 것은 아니다. 자연생태계에서의 질병은 꽤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과거부터 존재해오면서 특정 개체군이 과도하게 증가하는 것을 조절하면서 생태계를 유지하는 균형자 역할을 담당한다.
하지만 오늘 날, 무분별한 개발과 환경오염인간의 거주지 확대와 농토 확보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면서 야생동물의 서식지는 점차 줄어왔다. 그 결과, 단위 밀도 당 특정 개체군이 과밀해져 전염 가능성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지거나, 사람이나 인가의 가축과 야생동물의 접촉 가능성이 높아진 것은 분명 경계해야 할 문제다. 
질병이 생태계에서 자연스러운 것이라 해도, 질병에 걸린 동물을 발견했을 때, 마냥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치부하고 모른 척 지나가는 것도 썩 바람직하지 않다. 치료가 가능하다면 치료의 기회를, 치료가 불가하면 최소한 안락사를 통해 고통을 줄여주거나 다른 개체 간의 전파 가능성을 줄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개선충에 감염된 너구리는 먹이를 이용한 포획틀로도 충분히 쉽게 구조가 가능하다.
다만, 보온 능력이 떨어지는 만큼 포획틀에 머무는 시간을 최소화하거나, 머무는 동안 추위를 덜 느낄 수 있도록 비닐이나 이불 등을 이용해 보온에 신경 쓰는 것이 좋다. 


돌덩이처럼 변해버린 야생동물을 갑작스레 마주한다면 누구나 걱정이 앞설 것이다.
'혹시나 나에게 감염되면 어떡하지? 위험하지 않을까?', '저게 뭐야... 징그러워...', '더러워...'
같이 말이다.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질병에 감염된 야생동물과 그들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부족한 일반인이 접촉하는 것은 위험하다. 하지만 꼭, 직접 녀석을 만지고, 구조해야 도움을 주는 건 아닐 것이다. 녀석들을 살피고, 야생동물구조센터와 같은 전문 구조기관에 알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당장 포획하지 않을 시 위험할 상황이라면 장갑을 착용해 피부와 직접 접촉하는 것을 방지하고, 포획용 채나 담요/이불 등을 이용해 덮어 잡은 후 상자(너구리는 종이상자를 뜯고 나갈 수 있으므로 플라스틱 케이지를 이용하자)에 넣어 보호하면 된다. 추가적으로 약간의 물을 제공하거나, 따뜻한 곳에 두어 체온유지를 돕는 것 역시 필요할 수 있다.

질병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익숙하지 않고 징그러운 겉모습 때문에 혐오와 편견의 대상이 되거나 외면당한다면 그만큼 안타까운 것이 또 있을까? 녀석들은 처절하리만큼 힘을 내어 버티고 있고, 지금 바로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마법사의 저주에 걸려 돌덩이로 변해버린 너구리를 구해주는 신화 속 이야기의 주인공이 어쩌면 여러분일지 모르는 것 아닐까? 부디 외면하지 말고, 함께 해피엔딩을 써내려가 주길 당부 드린다.

생명의 끈이 얼마나 남아있을지 모르는 녀석에게도 햇빛은 소중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녀석들은 처절하리만큼 힘을 내어 버티고 있고, 지금 바로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부디 외면하지 말아주길 당부 드린다.



작성자
충남야생동물구조센터
재활관리사  김봉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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