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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19일 월요일

존재에 대한 감사

집 밖으로 나가 주위를 둘러보면 어떤 야생동물을 볼 수 있을까.
참새, 까치, 비둘기, 다람쥐 흔하디흔한 동물들이지만 이들도 야생동물이다.
야생동물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보호해야하는 귀한 동물만이 야생동물인 것도 아니다.
야생에서 자유로이 살아가는 모든 동물이 야생동물이다. 하물며 작은 들쥐나 개구리, 민물고기도 야생동물이란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들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오늘은 어떠한 이유들로 인해 홀대 받는 생명이 된 '그들'을 위한 이야기자 그들을 대하는 '우리'를 돌아보는 이야기다.

야생을 자유로이 살아가는 모든 동물이 야생동물이다.
늑대나 호랑이처럼 특별한 동물, 멧돼지나 두루미처럼 큰 동물, 황새나 저어새처럼 보호받아야 할 동물.
그들뿐만 아니라 아주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더라도 모두 야생동물이다.


대부분의 경우 인간은 자주 접하는 것들에 대한 감정이 빠르게 퇴색된다. 부모님의 사랑을 매일 새로이 되새기는 사람은 많지 않을 테고, 출근길 만나는 참새를 보며 매일 가슴 벅찬 사람도 없지 않을까. 드물고 귀한 것은 오래 기억되지만 흔한 것은 금방 잊혀진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검은머리물떼새를 처음 만난 날의 날씨, 주변 풍경과 소음까지 기억나지만 큰고니를 처음 촬영한 날이 언제인지 어디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물론 처음엔 그렇게 벅찰 수가 없었지만 수차례 반복될수록 그 감정은 점점 무뎌졌다. 어찌 보면 짧은 세월을 살아가는 인간에겐 자연스러운 모습이지만 그들의 생명을 책임지고 그들의 삶에 개입하는 소위 말해 '야생동물 전문가' 에겐 반드시 경계하고 멀리해야 할 모습이다.

감사하고 벅찬 마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사람 마음 참 간사하다.
(좌)검은머리물떼새, (우)큰고니


여행비둘기 혹은 나그네비둘기라 불리던 새가 있었다. 한 때, 하늘을 뒤덮으며 이동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개체수가 많았고 이동하는 무리를 일컬어 비둘기 구름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 많은 개체수 때문인지 멸종에 대한 경계심 따윈 없었고 그들을 사냥하는 것은 일종의 인기 스포츠가 되어 수만 마리가 희생됐다. 결국 1914년 신시내티 동물원에서 마지막 한 마리가 죽으며 지구상에서 살아 숨 쉬는 여행비둘기를 다시 볼 순 없게 됐다.

마지막 여행비둘기 'Martha'
(출처: http://onwisconsin.uwalumni.com)


우리 주변에도 여행비둘기와 같은 길을 걷고 있을지도 모를 동물이 있다. 살아있는 모습보단 싸늘한 주검으로 도로 위에서 마주치는 고라니다. 고라니는 IUCN(세계자연보전연맹)의 적색목록에 VU(Vulnerable, 취약) 등급으로 지정돼 있다. 하지만 국내엔 개체수 조절이 필요할 정도로 많은 고라니가 서식하고 있고 그래서인지 고라니에 대한 연구는 다른 종보다, 심지어 개체수가 훨씬 적은 중국고라니보다 부족하다. 그렇다 보니 개체수 조절이라는 명목으로 매년 많은 수가 수렵, 밀렵으로 희생되고 로드킬하면 떠오르는 동물이 고라니일 정도로 많은 수가 사고를 당하지만 개체수의 변화가 어떤지 알 길이 없다.

도로에서 만난 고라니와 야생에서 만난 고라니.
유해조수로 미움 받는 그들이 안쓰러울 따름이다.

(사진 출처 : 김봉균, 이준석)


고라니 외에도 까치, 오리, 꿩, 비둘기 그리고 야생동물의 범주에 속하진 않지만 거리를 배회하는 개, 고양이까지 많은 종들이 흔함을 이유로 차별을 받고 있다. 작아서인지, 그들의 감정을 느낄 수 없어서인지 가벼운 생명으로 취급받는 양서류, 파충류, 어류, 인간에게 피해를 주던, 주지않던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재미로 잡고 죽이는 곤충.
파리와 모기까지 사랑하라는 것도, 존중하며 살생을 멈추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현실이 어떻든 그들 또한 한 생명이란 사실은 인지해야 하지 않을까. 이 작은 사실은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 가슴에 쉽게 새겨지지 않으며, 이 작은 사실이 우리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우리 주변을 살아가는 수많은 야생동물들.
그들의 생명에 가치를 매겨선 안 되지만 자신도 모르게 차별을 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말이 있다. '직업에 귀천은 없다.' 한데 정말 그런가.
이 말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현실과 동떨어지게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모든 생명의 가치가 평등하다는 말도 그리 느껴져 안타깝다. 인간의 세상이 생겨난 이래 사람 사이에서도 생명의 가치가 나뉘지 않은 적이 없는데 하물며 동물들은 오죽할까.

태어날 때부터 가격이 매겨지는 동물들.
인간의 욕심은 사그라질 기미가 없다.


유해조수인지 아닌지, 개체수는 어떻고 생태적 가치는 어떤지 그러한 이유들을 막론하고 한 마리, 한 마리가 우리처럼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생명임을 잊어선 안 된다. 특히나 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이 매긴 그들의 가치가 어떠하든 그들을 대하는 자세에 다름이 없어야 한다. 물론 어찌할 수 없는 날들이  많겠지만 그래도 애써야만 한다.
나무가 아닌 숲을 보라지만 나무가 있기에 숲이 있고 그들이 있기에 지금의 야생, 생태계가 있다. 우리가 야생의 많은 것들을 누려오던 오랜 시간동안 그들의 존재에 대해 한 번이라도 감사해 본 적이 있었던가.

깊이 생각할수록 고민만 깊어지더라도 생각을 멈춰선 안 된다.


작성자
충남야생동물구조센터
연구원 이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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